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10 민주 항쟁 (문단 편집) === [[김영삼|양]][[김대중|김]]의 분열 === 이 일은 제5공화국 몰락 후 무정부 시기[* [[6.29 선언]]으로 전두환이 쫓겨나듯이 퇴임하고 그 후 [[노태우]]가 대통령으로 취임하기 전 날 1988년 2월 24일까지.]의 일이다. 개헌 이후 대통령 직선제가 16년 만에 부활하여 직선제 선거가 치러진다. || [[파일:external/www.segye.com/20090818002015_0.jpg|width=400]] || [[파일:external/www.kgnews.co.kr/208184_32055_4218.jpg|width=400]] || || 이랬던 [[김대중|그]][[김영삼|들]]이[* 주변 보좌관들은 두 사람의 사이가 정말 좋았다고 증언하고 있다. 해당 사진처럼 손을 맞잡는 경우는 늘상 있는 일이었고 기쁜 일에는 서로 얼싸안기를 수차례, 길을 가다가 서로 멀리서 상대를 발견하면 너나 할 것 없이 상대의 앞으로 달려가서 반갑게 인사했다고 한다. 두 지도자가 상대의 보좌관들을 잠깐 마주칠 때에도 불러서 바빠도 식사는 챙기고 다니라면서 용돈을 쥐어주거나 진행하고 있는 일의 안부를 가볍게 물어보며 격려한 일도 꽤 있었다고 한다. 그야말로 서로 호감으로 뭉친 한 패밀리급. 이런 절친 오브 절친이었으나... 결국 갈라서버렸고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사망할 때가 되어서야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입원실로 찾아와 화해의 제스처를 남겼다. [[http://mbn.mk.co.kr/pages/news/newsView.php?news_seq_no=447687|기사]].] || 이렇게 돌아섰다.[* 두 사진을 보면 그들의 측근들의 밝은 표정(좌)과 어두운 표정(우)이 서로 대비되는 모습이 두드러지게 보인다.] || [[http://theme.archives.go.kr/next/vote/info/voteInfo.do?turn=13&x=3&y=16|국가기록원 자료]]에 의하면 [[제13대 대통령 선거|1987년 대선]] 결과 * [[노태우]] (8,282,738표, 민주정의당): 36.64% * [[김영삼]] (6,337,581표, 통일민주당): 28.03% * [[김대중]] (6,113,375표, 평화민주당): 27.04% * [[김종필]] (1,823,067표, 신민주공화당): 8.06% * [[신정일]] (46,650표, 한주의통일한국당): 0.20% * [[홍숙자]] (사회민주당), 김선적 (일체민주당), 백기완 (무소속): 중도 사퇴 야당 후보였던 통일민주당 [[김영삼]]과 평화민주당 [[김대중]]의 단일화가 좌절되고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으로 인한 [[북풍]]으로 인해 야권이 축소되어 민주정의당의 [[노태우]]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이 때는 [[김종필]]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해 네 후보는 자신들의 출신 지역들의 지역감정을 고취하였고 이는 극단적으로 표출하는 양상으로 흘러갔다. 이러한 배경으로 당선된 노태우의 득표율은 대통령으로서 사상 최저였으며 당선 이후에도 13대 총선에서 과반확보 실패로 여소야대 국면을 맞게 되었다. 이후 노태우는 김영삼, 김종필을 끌어들여 [[민주자유당|3당 합당]]을 감행함으로써 여소야대 국면을 극복하게 되고 이로 인해 기존 정권의 색채는 계속 유지된다. 이 때문에 6월 항쟁을 가리켜 '절반의 성공'으로 지칭하는 의견도 있다. 밥상은 국민들이 잘 차려주었는데 정작 잘 떠먹어야 할 [[김대중]]과 [[김영삼]]이 서로 맛있는 [[대한민국 대통령|반찬]]을 먼저 먹으려고 싸웠다가 정작 [[노태우|전혀 뜻밖의 사람]]이 먹어버린 격이다. 그러나 이미 크게 치솟은 개혁의 물결을 묵살할 수는 없었으므로 민주화와 자유화, 그리고 냉전 붕괴에 의한 공산권과의 수교 등(이른바 북방외교)은 활발히 진행해야 했다. 뿐만 아니라 [[전두환]]이 퇴임 후 [[백담사]]에 칩거한다던가, 5공 청문회가 열린다던가 하는 5공에 대한 공격적인 상황도 계속해서 벌어졌던 것은 사실이다. 한편 1987년 선거는 지역대결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 첫 번째 선거이기도 했다. 노태우 후보는 대구, 경북, 강원, 인천, 경기, 충북에서, 김영삼 후보는 경남과 부산에서, 김대중 후보는 전남과 전북, 광주, 서울에서 김종필 후보는 충남[* 충북에서는 노태우, 김영삼에 이어 득표율 3위를 기록했다.]에서 각각 득표율 1위를 기록했다. 물론 [[지역감정]]을 이용한 선거의 기원은 어디까지 잡겠다고 말하는 데도 다양한 논의가 있을 정도로 1960년대 후반 혹은 1970년대 초반부터 조짐이 나타나지만 각 후보자들의 연고지와 그 인근에 다득표지가 집중된 것이 1987년 선거에서부터 유독 눈에 띄었으며 이것이 현재 대한민국 정치에도 큰 틀에서 유지되고 있다는 점에서 많은 연구의 대상이 되었다. 1987년에 있었던 6월 항쟁과 개헌, 대선 등을 통해 확립된 각 정당과 정파의 합종연횡, 정치 체제, 선거에서 드러난 지역구도, 대중에게 각인된 정치 의식과 사회 의식, 세대 의식 등의 다양한 개념 등을 통틀어 흔히들 '87년 체제'라 칭한다. 이 '87년 체제'는 비단 정치 구도를 칭하는 범주를 벗어나 한국 사회 전반의 구조와 형태를 포괄적으로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고 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